단상93. 백수
화순수도원 시절, ‘백수’라는 개가 있었습니다. 백수는 수도원 앞집 개였는데, 시도 때도 없이 수도원으로 마실 와서 한 수사님이 붙인 별명입니다. 진돗개의 피가 섞여 있는 이 녀석은 흰색인 데다가 할일 없이 남의 집에 와서 서성거려서 그렇게 붙여진 것입니다.
2010년 10월 저희 무등이가 새끼를 10마리나 낳았는데, 어느 녀석과 눈이 맞아 그리되었는지 몰랐습니다. 추정이지만 저희는 이 백수 녀석이 필경 그 생부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이 녀석이 수도원을 드나드는 횟수가 부쩍 늘었고, 무등이와 어울려서 노는 모습을 보니 이러한 확신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저희는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한두 마리도 아니고 열 마리씩이나 부양가족을 늘려놓아서 내심 시름이 컸습니다. 그래서 무등이가 또다시 새끼를 낳을까 노심초사하여 백수가 수도원에 나타나는 즉시 매정하게 쫓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주방 수사님이 무등이 뿐 아니라 백수에게도 밥을 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무등이 새끼들이 다 분양되어 요즘 무등이가 우울증에 빠진 것 같아 둘이 놀면 좋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백수도 주인이 돌보지 않아 불쌍하고 또 순하고 잘 생겨서(동물도 일단은 잘생기고 봐야 하는 것 같습니다) 자유롭게 와서 놀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어 저희는 그 이후론 백수가 나타나도 쫓지 않게 되었습니다. 백수는 처음엔 새로워진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여 여전히 눈치를 보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대담해져 갔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하던 녀석이 이젠 아예 집에 갈 생각도 안 하고 무등이 집을 차지하고 들어가 잠을 자고 가질 않나, 무등이 밥을 지가 먹질 않나 그야말로 주객전도가 따로 없었습니다. 무등이는 백수가 자고 갈 때면 방을 내주고 집 밖에서 자고, 백수가 자기 밥을 먹으면 옆에서 다 먹을 때까지 서성거리곤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아, 개들도 서열이 확실하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백수가 기선을 제압한 것입니다. 그래도 둘이 지내는 것을 보면 나름의 질서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 재밌었습니다.
백수와 무등이는 둘 다 과묵한 성격입니다. 서로 따로 떨어져 쉴 때도 있고 함께 뛰어다닐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늘 조용히 움직입니다. 수도원에 손님이 와도 사납게 짖거나 괴롭히지 않고 늘 좋다고 꼬리 칩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방문하는 사람들로부터 종종 ‘환대를 중요시하는 베네딕도 수도원 개답습니다.’라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백수는 수도원 개는 아니지만 어느새 수도원 개처럼 되었습니다. 수도원을 이제 자기 잘 곳과 놀 곳처럼 생각하는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주방 수사님의 개 사랑으로 뜻하지 않은 부양가족 하나가 더 늘었지만, 주인에게 보살핌을 받지 않는 백수가 수도원에서나마 사랑을 받고 배운다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인간에게뿐 아니라 동물과 자연, 더 나아가 모든 피조물에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무등이와 백수 모두 이 세상에는 없고 함께했던 기억만이 아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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