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76. 일단정지
교통법규에는 ‘일단정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안전을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만 내달리는 차량이 어느 지점에서 정지하지 않으면 사고의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듭니다. 정신 없이 앞으로만 내달리다 보면 지치고 건강을 해칠 수 있습니다.
저도 종종 이런 일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특히 2010년 1월 화순수도원에 부임했을 때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직 40대 후반이었으니 지금보다도 훨씬 건강했고 열정도 많았던 때였습니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무슨 일을 벌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열악한 공동체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을 현실에 맞게 하나하나 추진해 나갔습니다. 그러다 3개월이 지나 일단정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런 글을 써서 화순수도원 홈피에 나누었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이 화순이란 사막에 부임해 온 지 만 3개월이 되는 날입니다. 실제로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마치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지루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크고 작은 많은 일과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온갖 거창하고 요란스런 인간적 계획이나 의지를 내려 놓고 모든 것을 성령의 이끄심에 맡기고자 했던 시간이었지만 정작 정신 없이 달려온 듯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이끄심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잠시 멈추어 서서 다시 뒤를 돌아보며 원기회복을 위한 시간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우리 삶에서 재충전의 시간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시간은 창조적 여백과도 같습니다. 몸이 지치면 정신도 마음도 소진되기 마련입니다. 몸과 마음과 정신을 모두 돌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홀로 물러나는 시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금까지의 시간은 함께의 시간, 나섬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제게는 홀로 물러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러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전히 함께 나서야 할 시간임이 분명하지만 잠시라도 일단정지 하고자 합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직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아름다운 꿈같은 시절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나를 기쁘게 내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지금 본당이라는 새로운 공간, 새로운 공동체에 있지만 이 또한 저를 위한 하느님 섭리의 이끄심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