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38. 이중 잣대
우리는 보통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남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 잣대의 눈금이 같으면 좋은데 유감스럽게도 다릅니다. 한 면은 느슨하지만 다른 면은 매우 촘촘합니다. 그래서 상황과 필요에 따라 우리는 자신과 남을 위해 이 잣대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대개 느슨한 면은 우리 자신을 위해 장기長期 혹은 영구永久 임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을 위해서는 늘 촘촘한 면이 애용됩니다. 이것을 일컬어 외강내유外剛內柔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남에게는 엄격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과 수도생활을 통하여 인간적, 영적 성숙이 깊어질수록 이 잣대 사용법도 점차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자신과 남에게 같은 잣대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것이 엄격한 면이든 느슨한 면이든 말입니다. 이 경우는 그래도 일관성이 있습니다. 처음의 경우보다는 많이 발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너무 느슨한 잣대를 사용하다 보면 삶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으로 엉망진창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너무 촘촘한 잣대만 사용하다 보면 삶에 여유나 여백이 없고 결국 오래 못가고 용만 쓰다 사망(?)하게 됩니다. 모든 면에서 분별과 중용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이런 시기가 지나다 보면, 이제 잣대 사용법이 처음과 완전히 다른 식으로 전개됩니다. 다시 이중 잣대를 갖게 되는데, 이제는 남에게는 점차 느슨한 면을 들이대고 자신에게는 점차 촘촘한 면을 들이대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모습은 영적, 인간적 성숙의 표지입니다.
외강내유의 모습은 우리 신앙생활과 수행생활 초기의 전형적 모습으로, 아직 영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덜 숙성된 모습입니다. 그러다 점차 진보하게 되면 될수록 외유내강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즉 수행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아파테이아’, 즉 온갖 욕정에서 벗어난 내적 평정 상태(늘 한결같은 평상심의 상태), 어린이와 같은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의 상태와도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아파테이아를 두고 바로 ‘온유’, ‘친절’, ‘관대’로 표현되는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했습니다.
남에 대한 관대함과 부드러움, 친절함과 상냥함 등은 모두 우리 영적, 인간적 성숙의 표지입니다. 이제 ‘외강내유’에서 ‘외유내강’으로의 여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도록 합니다.
(허성석, 『바닥친 영성』, 분도출판사 2019, 143-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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