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30. 엇갈린 시선
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 역시 사막 거주자 중 하나였습니다. 어느 화창한 오후, 시인이 수도승에게 자작시를 보냈습니다. 그는 거기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노래하라! 나무들이 우는 것처럼.”
수도승이 화답했습니다. “나는 노래하리라. 나무들이 웃는 것처럼.”
그러자 그가 물었습니다. “나는 ‘우는 버드나무’는 들어보았지만, ‘웃는 플라타너스나 소나무’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소. 비록 포플러가 아름답게 재잘거린다 할지라도. 당신은 들어보았소?” 시인은 말을 이어갔습니다. “당신이 나무에 대해서 많이 아는지 잘 모르겠소. 나무들 역시 생명이 있는 존재들이오.”
수도승이 다시 응대했습니다. “내게는 나무들이 속삭이고 춤추고 있는 듯하오.”
다시 시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무들은 미풍에 달콤하게 속삭이네…. 어쨌든 나무가 논점이 아니오. 바로 ‘노래’이지! 당신 주위의 피조물에 마음을 열어보시오. 자연은 소비와 생산을 위한 자원 그 이상의 것이오.”
그러자 수도승은 이런 시로 응답했습니다. “바람에 너울대는 나무들. 울거나 웃거나, 노래하거나 춤추지도 않고 속삭이지도 않네. 단지 서서 너울댈 뿐이라네. 울거나 웃거나, 노래하거나 춤추거나 속삭이는 것은 단지 우리 마음일 뿐이라네. 모든 것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마음으로 변화한다네.”
그런 다음 수도승은 기도하러 갔습니다.
시인은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이상하군. 내가 그러한 순간을 익살스러운 겨루기로 바꾸다니!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스운 경쟁에서도 기쁨과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좋은 일이지. 아마도 서로 다른 존재의 층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아닐까!”
얼마 후 시인은 다시 수도승에게 말했습니다. “내 시보다 당신의 사랑스러운 시를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할 것 같소. 비록 내가 당신의 시를 대단히 즐겼다 하더라도 아직 다른 논점이 남아 있소.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에 보다도 인위적 제도에 더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오.”
그러자 수도승이 화답했습니다. “나는 절대자에 의해 창조된 자연을 존중해 왔소. 나 역시 자연의 한 조각이라 생각하오. 그래서 나는 자연을 마치 정복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을 정말 증오하오. 나는 자연이고 자연은 나요.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인류 문명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소. 오직 우리 인간만이 자연을 파괴할 뿐이오.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사는 법을 잘 모르오. 나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노장사상을 좋아하오. 자연은 단지 자연 자체일 뿐이라오.”
이 말을 들은 시인은 기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이 말에 나는 너무 기쁘다오. 우리는 이 점에서 일치하오. 노장사상은 아마도 세계에서 성령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언일 것이오. 나는 당신이 훌륭한 수도승, 참된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수도승 역시 화답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말했을 뿐 결국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소.”
시인은 마지막으로 수도승에게 이런 묵상 거리를 던져주었습니다. “우주는 하느님의 인격으로 잉태된다. 모든 분자는 그분의 영을 발산한다. 모든 장소가 거룩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자질을 소유한 것처럼 어떤 특별한 장소들은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수도승과 시인의 엇갈린 시선에서 시작된 대화는 결국 하나로 통합되어 끝났습니다.
* 이 글은 미국 캘리포니아 교구 소속의 시인이자 화가인 Steven Frost 신부가 은퇴 후 사막수도원에서 생활할 때 어느 날 이메일로 주고 받았던 내용을 '엇갈린 시선'이란 제목으로 정리해 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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