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55. 멋진 최후
27년 전 로마에서 공부할 때 어떤 책을 보다 다음 구절을 접하고서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내가 죽거든 내 육신을 사막에 내버려 새들과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십시오. 나는 하느님을 거슬러 많은 죄를 지었기에 무덤에 안장되기에 합당치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사는 그곳에 구덩이를 파서 어떠한 영예의 표도 없이 나를 묻어주십시오. 죄 많은 내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여러분에게 간청하며 또한 여러분 모두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나 역시 여러분을 용서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15세기 당시 쇠퇴했던 러시아 수도승생활 개혁운동을 주도했던 닐 소르스키Nil Sorskij(1433-1508년)라는 영적 사부가 임종 전 자기 제자들에게 했던 마지막 당부였습니다. ‘닐 소르스키’란 이름은 ‘소라Sora 강의 닐’이란 뜻으로, 닐이 소라 강 인근에 은둔해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닐은 단순하고 엄격한 생활로 수도승생활의 이상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했던 분이었습니다.
그의 유언과도 같은 이 말은 제게 “어떻게 죽음을 이렇게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자아냈습니다. 한 시대의 영성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위대한 사부의 유언치고는 너무 소박하고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영예의 표도 없이’ 그저 빈손으로 하느님께 되돌아가고자 하는 닐의 간절한 소망이 묻어납니다. 죽는 순간까지 하느님 앞에 자기 존재의 실상을 깊이 통찰하고 있지 않고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그분의 엄위하심 앞에 우리 존재는 실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분의 자비만이 우리 허물을 씻고 우리 나약함을 치유할 것입니다. 이렇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아무나 이런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하느님 안에서 죽음을 잘 준비해 온 자만이 이런 겸손하고 자유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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