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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51. 다양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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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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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30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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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41

  19년 전 미국 사막의 그리스도 수도원에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밤기도를 위해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주방을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밤기도는 보통 4시에 시작되는데, 그때가 3시 40분경이었습니다. 거기서는 밤기도가 끝난 직후나 아침기도 후에 아침식사를 자유롭게 합니다. 특별한 것은 없고 주방에 미리 준비된 것을 각자 침묵 중에 간단히 챙겨 먹습니다. 저의 경우는 밤기도 후 오전 5시경 커피 한 잔과 삶은 달걀 하나, 그리고 바나나 한 개를 챙겨 먹었는데, 이는 순전히 생존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한 형제가 벌써 나와 형제들과 손님들이 먹을 아침식사를 혼자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그 형제의 일은 아니었지만, 그 일을 맡은 형제가 피정에 들어가면서 부탁을 해서 자기 일과 동시에 두 가지 일을 그 이른 새벽에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함께 거들었고 담당 형제가 피정을 마칠 때까지 매일 새벽마다 조금씩 거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준비된 아침식사를 하곤 했는데 이렇게 보이지 않는 손들의 노력이 있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며 동시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형제들은 남들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이런 봉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누구도 선호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매일 끝기도 후에 다음날 아침식사를 위한 준비를 해놓고 다음 날 새벽에도 밤기도 전에 일찍 나와서 이것저것 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거의 드러나지는 않지만 많은 주의와 인내를 요구하는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서인지 이번에는 이 일을 담당하던 형제가 3주간 고향 방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누군가가 이 일을 대신해야 하는데 저는 속으로 “설마, 나에게는 안 돌아오겠지!” “다른 형제들도 많은데 나에게는 부탁을 안 하겠지!” 하며 넋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라고 진짜 설마가 사람을 잡고 말았습니다. 며칠 전 바로 저에게 부탁이 들어 온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좀 해 줄 수 있냐고 물어서 그 자리에서는 전혀 주저 없이 “좋아. 내가 할께. 아무 문제 없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아니, 다른 형제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나인가?” “왜 나에게 이 일을 부탁하는 건가?” “내가 너무 만만해서 그런가?” “부탁하는 것 거절하지 않고 다 받아들여서 그런가?” “아니, 사람을 어떻게 보는 거야!” 등등 별의별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소위 교만의 악령이 방문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는 즉시 이러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정말 수행을 헛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선 곧바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나를 얼마나 신뢰하면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겠는가!”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자신을 비우고 또 애덕을 실천할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네.” 그래서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지만 투덜대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기로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의에는 보이지 않는 고마운 손들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매일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 뒤에는 이런 작은 손들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손들을 많이 발견하고 느낄수록 그만큼 더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가정이나 사회 혹은 수도원 등 인간이 함께 모여 사는 어떤 공동체든 거기에는 늘 역할이 분담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역할은 앞에서 어떤 역할은 뒤에서, 또 많은 주의와 땀을 요구하는 역할이 있는가 하면 비교적 수월한 역할도 있습니다. 각각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공동체는 원활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이는 마치 크고 작은 기어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 큰 동력을 일으키는 것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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