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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71. 틀 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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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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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0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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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22

  화순수도원 정문 표지석 설치 작업을 진행하면서 새롭게 배운 것이 있었는데, 소위 ‘틀 깨기’입니다. 이 작업은 글자 선정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글자체로 할 것인지 먼저 표지석 작업을 도와주기 위해 오신 수녀님과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십 가지의 다양한 글자체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선에서 대여섯 가지로 추렸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수녀님이 선호하는 글자체와 제가 마음에 두는 글자체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녀님의 유형과 제 유형은 완전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제 눈에는 수녀님이 선호하는 글자체가 표지석에는 영 어울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만큼 제가 보통 생각하던 평범한 글자체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속으로 “웬, 아이들이 쓴 글자 같은 것을 좋다고 하는지 모르겠네.” 하며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수녀님은 제가 선호하는 글자체를 미리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사님은 분명 이런 글자체를 좋아할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알았지요?” 물으니, “안 봐도 다 알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대여섯 개로 추린 글자체를 공동체 형제들에게 보여주어 의견을 묻고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형제들에게 물으니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수녀님이 선택한 글자체가 좋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속으로는 여전히 “너무 티는 것이 아닐까?” 하고 다소 우려되기도 했습니다. 


  모두의 합의로 결정된 이상한(?) 글자체를 표지석에 맞게 확대 디자인하여 돌 위에 위치시키고 붙이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글자를 오려서 돌 위에 붙인 뒤에도 제게는 영 이상하게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글자가 하나둘 패어나가면서 종이로만 보았던 느낌과는 영 다른 느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글자 파기가 다 끝나고 돌 위에 올라서서 보니 제법 괜찮게 보였습니다. 


  그 후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고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글자에 검은색 라카칠을 하고 보니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너무 튀지도 않고 또 단조롭지도 않고 그야말로 제가 보지 못했던 예술성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저는 저 자신이 고정된 틀에 갇혀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도원 간판 글씨는 이러해야 한다.’는 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틀을 깨고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니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틀을 깨는 것은 중요합니다. 틀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또 다른 세계를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배움은 참으로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에서도 평범한 일상 안에서도 정말 배울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제자요 학생으로 머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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