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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63. 주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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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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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9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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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84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강점이 있는가 하면 약점도 있기 마련입니다. 제게 있어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음식 만들기입니다. 저는 다른 것은 그럭저럭할 수 있고 두려움도 별로 없지만 유독 음식을 만들어야 할 때면 주눅이 들고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원래 먹는 것에 별 관심이 없고 식성도 까다롭지 않아 이것저것 잘 먹기 때문에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다.’라는 나름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제게는 한 끼 먹으려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곤 했습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음식을 만드는 것을 배우지 못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그럭저럭 남이 해주는 밥만 잘 챙겨 먹다가 미국 사막수도원에 가서 사달이 났습니다. 그곳은 외부 직원 없이 한두 명의 수도자들이 매일 돌아가면서 주방을 맡아 식사를 준비합니다. 잘하고 못하고도 없습니다. 선택의 여지 없이 게시판에 주방 소임에 배정되면 그날은 온종일 주방에서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쯤 되니 제게는 마치 군대(?)처럼 생각되곤 했습니다. 공동체 형제들뿐 아니라 피정객과 방문객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데 하루 대략 사오십 명분을 준비해야 합니다. 


  어느 날 제 이름도 여지없이 주방 소임 란에 등장했습니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어찌해야 좋을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노련한 형제들에게 물어물어 천신만고 끝에 뭔가를 만들어냈는데, 바로 스파게티였습니다. 당시 심정으로는 오늘 한 번 쓴 맛을 톡톡히 보여주어 다음부터 저를 다시는 주방 소임에 배정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제 스파게티를 맛본 형제들 모두 탄성을 질렀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스파게티 평생 처음 먹어봤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제게 ‘자-알 먹었다’며 감사의 말을 던지고 가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소위 엉터리 초짜가 대박(?)을 터뜨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다음에도 또 시키고, 또 시키고…. 제가 주방을 맡을 때마다 형제들은 늘 만족스러워했으니 정말 빼도 박도 못하고 점점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사막을 떠나면서 가장 홀가분했던 것 중 하나는 이제 더는 주방 소임을 맡아 음식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귀국 후 몇 개월이 지난 후, 화순수도원에 분원장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오자마자 주방 수사님이 일주일 간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제가 다시 총대를 멘다고 임시로 주방을 맡게 되었습니다. 참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마치 미국 뉴멕시코 사막이 이곳 한국 화순 사막으로 연장된 듯 느껴졌습니다. 하느님은 참 짓궂은 분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종종 제가 싫어하고 피하려고 하는 것을 하도록 하시니 말입니다. 


  한 가지 고백하건대, 제 식단은 사순 식단이었습니다. 당시가 사순시기였으니, 그 시기에는 적격이었던 셈입니다. 일주일 동안 형제들의 외모를 사순모드(?)로 바꾸는데 혁혁한 공헌을 한 셈입니다. 그래도 음식 투정 안 하고 인내와 애덕으로 맛있게 먹어준 형제들에게 감사했습니다. 주방 수사님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니 저는 다시 해방감을 맛보며 순간 ‘주방이여, 안녕!’이란 말을 하려다 즉시 다시 거두어 들였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짓궂으신 하느님이 저를 다시 주방으로 소환하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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