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대는 자기희생을 목말라하고 있다.
1. 시국미사와 하느님의 자기희생
국정원의 대선 댓글 의혹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혼란한 시국상황에서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국정원의 개혁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선언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그 이전부터 이미 용산, 제주의 강정, 밀양 등에서 끊임없이 시국미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를 두고 교회가 왜 현실정치에 깊이 개입하는가, 사제들이 왜 길거리에까지 나와서 시위를 하는가 하며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마저 그러하여 시국미사는 종전처럼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장에 천막을 치고 그 자리를 지키며 미사를 봉헌하는 동료 사제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진다.
길거리에서 종교 의식인 미사를 드리는 것이 정당한가 묻기 전에 우리는 그곳에서 거행되는 미사가 무엇인지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미사의 의미를 안다면 미사를 드리는 곳이 성전이라는 건물에 제한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미사는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의식이다. 이 미사는 이미 그리스도 이전 하느님의 자기희생에 기인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당신의 생명을 세상에 전달해주셨다. 인간이 아무리 사악하게 굴어도 하느님은 그들 마음 안에 살아계신다. 사람들은 악한 인간을 보면서 하느님이 그들을 벌해주기를 바라지만 하느님은 그들 마음 안에 살아계신다. 하느님이 그들 마음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편에서 하느님의 이 사랑을 실천하셨다. 사제 가문이 아니었지만 이웃(온 인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 이 자기희생이 그분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받아먹어라.” “이는 내 피다. 너희를 위하여 흘릴 피다. 받아마셔라.” 그분은 스스로 제물이며 제단이며 사제였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이를 통해 하느님의 자기희생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처럼 또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희생시키며 이웃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자기희생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을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세상에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자기의 행복을 위하여 황소와 염소 등 다른 존재의 피를 제단에 뿌리며 하느님과 화해하고자 한 구약시대와는 달리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잡아 희생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과 함께 자기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내놓기 위해서이다. 미사를 드리는 이는 그들 자신이 제단이며 희생 제물이며 사제인 것을 안다.
미사는 자기만의 부를 추구하는 세상에서 자기희생과 나눔만이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인류를 자기희생으로의 초대하는 잔치다. 이 잔치에서 그리스도인이 쪼개진 성체를 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쪼개고 희생하며 나누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이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하며 나누어주는 성체를 받으면서 “아멘” 하고 응답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온전히 녹이며 우리 몸 안에 들어오셨듯이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성체처럼 녹이며 이웃 안으로 들어가 사라지겠다고, 성체로 세상을 살겠다고, 거기에 세상의 평화가 있다고 응답하는 것이다. 미사는 자기희생이 없이는 달리 이 세상에 평화를 강물처럼 흐르게 할 수 없다는 진리를 일깨워 준다.
자기희생 없이 이웃의 행복과 세상의 평화에 기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미사의 핵심이다. 우리의 행복과 세상의 평화를 원하시는 하느님은 가난하고 고통 받고 소외된 인간,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의 마음 안에, 그들의 살과 피 안에 현존하신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이들의 살과 피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분의 죽음을 기억하는 미사를 드리는 이유는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하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주신 그분처럼 우리도 이 말을 하며 가난한 이, 소외 받은 이들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 그 마음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 얻을 것을 생각하는데 익숙해 있는 현대인은 부와 명예를 자기의 존재 안에 쌓으려는 욕심으로 더 큰 창고를 짓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고는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9)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는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돈과 권력의 유혹이 커서 자기희생과 나눔을 강조하는 것이 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인간은 남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행복을 희생할 줄 아는 존재이다. 부와 권력과 명예, 이런 것들이 행복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족하다 하더라도 인간은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재물과 권력을 자기를 향하여 쌓을 때는 불행의 늪에 빠져들기 일쑤이지만 남을 향하여 자기의 존재까지를 나눌 때 인생이 풍족해진다는 것 또한 안다.
나눔의 삶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본래 인간은 자기의 살과 피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시며 우리를 격려하신다. 혈연과 지연 학연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라. 실제로 우리는 자기희생과 나눔의 삶을 살고 있다. 부모의 자식 사랑, 자식의 부모 사랑, 부부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은 자기희생의 토양에서 나온 행위이다. 어찌 이 위대한 사랑을 가족 안에만 머물게 하겠는가. 이를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묶어두려고 할 때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으로 변질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만나는 세상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로 대하시는가 하면 모든 이를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자매로 대하셨다.(마르 3,31-35)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나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로 만날 때 우리는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가족 사랑의 심장에는 –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 인류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인류애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사랑은 순수하지 못하다.
천주교 신자들은 성체를 영하기 전에 사제가 “이 성찬에 초대를 받은 자는 행복하다.”는 말을 듣는다. 자기를 희생하며 나누는 자만이 인생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자기희생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은 행복을 원하는 자는 당연히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처럼 자신의 몸을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내놓기 위해서 미사를 드린다.
2. 미사의 장소
이 희생제사는 성전 안에만 제한되어 봉헌될 수 없다.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크리스마스(= 그리스도의 미사)의 현장은 마구간이었고, 그분이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당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며 미사를 봉헌한 곳은 성문 밖 십자가였다. 그분께서 많은 구경꾼들이 조롱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당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하늘에 바칠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복음사가는 전한다. 희생 제사의 절정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온 우주가 마음을 찢으며 그분의 희생 제물을 받아들인 것이다. 성전의 휘장을 찢는 그분의 희생제사에서 인류는 사랑을 느꼈고 평화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을 보았다. 미사는 가난하든 부자든, 힘이 있든 없든 모든 인간을, 종족과 언어와 혈통을 넘어 온 인류를 자기희생으로 초대하는 전례이다.
그분의 자기희생을 기억하는 미사는 성전의 휘장을 찢으며 온 인류의 마음 안으로 거행되는 희생 제사이다. 온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게 하는 미사는 그 성격상 성속을 가리지 않고 세상 어디서나 봉헌되어야 한다. 일정한 시간에 성당이라는 일정한 장소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은 세상 어디서든 미사를 드리기 위한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시국미사(시국미사라는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용어이다. 그만큼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교회의 모습을, 성체의 삶을 보여주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를 드리는 것은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지 못하고 자기만의 안일과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시국을 향하여 자신을 희생시킨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 보이며 세상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초대하기 위함이며, 세상 모든 이를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사제적 존재로 초대하기 위함이다.
미사는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 없이 자기의 안위와 행복을 위하여 남을 희생시키려는 마음으로는 드릴 수 없다. 사제들이 현장에서 시국미사를 드리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돈과 권력에 사로잡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소외시키고, 약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거민, 쌍용차 사건, 밀양 송전탑 사태 등은 자기를 희생시키지 못하는 마음, 남을 희생시켜 자기의 배를 불리려는 구조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자기희생의 소리가 터져 나와야 한다.
미사는, 즉 자기희생은 예식으로만 끝이 날 수 없는 삶 자체이다. 성전에서 시국을 위한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같은 이유로 이 소리는 성전 밖에서도 울려 퍼져야 한다.
미사를 성전 안에서만 드려야 한다는 주장은 미사의 핵심을 모르는 데서 나온 소리다. 우리는 자기희생을 성전 안에만 가두어 놓을 수 없다. 현장에서 드리는 미사에서 우리는 온 인류가 자기희생에 초대 받았음을, 시대가 자기희생을 목말라하고 있음을 읽어야 한다. 시국미사를 일종의 정치적 시위로 간주하려는 것은 미사의 이런 희생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제는 성당 안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도 온 우주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온 우주와 함께 미사를 드린다. 미사는 온 우주가 자기희생의 바탕에 근거하고 있음을 선언하며 온 우주를 희생으로 초대하는 제사이다. 그러기에 자기를 희생 제물로 내놓지 못한 미사는 미사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
세상의 평화는 자기희생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미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세상의 평화를 추구하는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에서 말한다.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왜냐하면 사도직 활동의 목적이 신앙과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가 한데 모여 교회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희생 제사에 참여하고 주님의 만찬을 먹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전례헌장 10항)
여기서 전례행위는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행위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하신 것은 일주일에 한번 성당에 모여 당신의 몸을 나누면서 당신을 기억하라는 명령 이상이다. 이 말씀은 미사 중에만 사제의 입을 통해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예식에 참례하는 모든 이가 – 아니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라도 - 일상에서 마음에 새겨야 하는 삶의 방향을 담고 있다. 아무리 주일을 거르지 않고 열심히 미사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밤샘을 하면서 성체 조배를 한다 하더라도 일상에서 자기의 살과 피를 이웃과 나누지 못하는 인색한 삶을 산다면 주일을 지키고 성체를 영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체를 영하는 신자는 자기의 몸을 성체로 주신 그리스도처럼 또 다른 성체로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자기의 살과 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이웃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쪼개고 희생하면서 이웃의 몸 안으로 녹아들어가는 행위가 어찌 전례를 행하는 중에만 일어날 수 있겠는가. 미사는 그 성격상 교회의 전례 안에 갇혀있을 수 없다. 자기희생, 신자들의 사제직분은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방향이다.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평화를 원한다면 자기희생을 근본으로 삼고 미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야 한다. 자기희생이 사라진 사회는 자비로울 수 없고 그렇기에 평화로울 수 없다. 미사는 자기의 행복을 빌기 위해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자기의 행복을 포기한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는 희생제사이다.
그리스도인이 대사제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영하는 이유는 자기만의 구원 자기만의 행복을 넘어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처럼 대사제로 세상을 살기 위해서이다. 이를 전례헌장은 이렇게 말한다. “전례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전례 안에서 인간의 성화가 감각적인 표징들을 통하여 드러나고 각기 그 고유한 방법으로 실현되며, 그리스도의 신비체, 곧 머리와 그 지체들이 완전한 공적 예배를 드린다.”(전례헌장 7항)
미사는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전례를 넘어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쪼개며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이며(ecce!) 세상이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시위이다. 그리스도는 성전 안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들판에서 만민이 보는 앞에서 돌아가셨다. 미사는 만민을 이 현장으로 초대하는 초대장이다.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을 때 평화의 빛이 세상을 향하여 발할 것이다. 미사 때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이 성찬에 초대받는 이는 복되도다.”하고 외치는 사제의 소리는 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모인 자들을 향한 소리가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다.
세상의 정의와 평화는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희생으로 내놓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찌 이 미사가 성전 안에서만 행해지는 전례이겠는가. 미사는 세상을 향한 소리이면서 미사를 드리는 사제 자신을 향한 소리이기도 하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모두가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평화와 정의를 외치는 소리는 자기를 희생 시키는 일이 없이는 공허할 뿐이다. 세상을 위하여 초대하는 자기희생에 응하는 자가 드디어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행복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전례헌장을 통하여 “사람들이 전례에 나아갈 수 있게 되기 전에 먼저 신앙과 회개로 부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9항)며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는 것도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한 삶, 일상에서 성체의 삶을 살지 못한 삶에서 신자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선포하여, 한 분이신 참 하느님과 그분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자신의 길에서 회개하고 참회를 하게 한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신앙과 참회를 권고하여야 하고, 더 나아가서 성사들을 받도록 준비시켜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고, 애덕과 신심과 사도직의 모든 활동으로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그러한 활동으로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 세상에 매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상의 빛이 되고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야 한다.”(전례헌장 9항)
3. 그릇된 성체 신심
성체신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이에게 위안과 행복을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마음을 발하게 한다.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분처럼 살겠다는 마음을 발하게 한다.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받아먹어라.”는 말은 사제만이 그것도 교회의 전례 안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을 전례용으로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구실로 더 이상 자기는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해석하며 편하게 사는 방식을 찾으려 하는 것은 성체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성체를 영하면서도 자기를 쪼개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안고서도 십자가를 지지 않고 안락하게 사는 꿈을 꾸는 것은 파렴치한 짓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묵상하면서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봉헌하겠다는 마음이 발발하지 않는다면 이는 잘못된 신심이다. 아무리 밤샘을 하면서 성체 앞에 꿇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하더라도 이 마음이 이웃 사랑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성체 앞에 앉아 있는 동안만 유효하다면 그 밤샘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체신심은 예수님의 관심을 나의 관심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웃에 대한 관심이다.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으로 내놓으신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으면서 자신의 안위와 행복과 구원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이들은 바오로가 당시 코린토 공동체 신자들을 질책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1코린 11,20) 그들은 주님의 고난은 기억하지 않고 자기 배 불릴 생각만 하며 성찬례에 참석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몸을 먹으면서도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11,21)하였던 것이다.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온전하고도 완전한 자기희생과 나눔과 사랑을 기억한다면 서로 많이 먹으려고 다투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몰염치한 짓인지 알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바오로는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하고 물으며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1,22) 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바오로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오로 자신이 그분의 자기희생을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 점을 다시 상기시킨다. “사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1,23-26) 어찌 그 몸을 자기만을 생각하며 먹을 수 있겠는가. 그런 마음으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1,27.29)
매일 영성체를 하여도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조금도 희생하지 못한다면, 희생 대신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만 바친다면 어찌 온 인류의 평화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주님의 몸을 합당하게 모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성체를 영하기 전에 서로 나누는 평화의 인사가 전례의 한 부분이기만 하다면 어찌 그 평화를 그리스도의 피로 주어진 평화라 할 수 있겠는가. 미사를 개인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여기는 풍토는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미사를 잔치로 이해하는데 이의가 없다. 미사가 잔치라면 미사를 통해 우리는 나눔을 접하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을 꾸짖었다면 그런 나눔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눔이 없는데 어찌 그 모임을 사랑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자기 먹기에만 바빴고, 자기 구원에만 관심이 있었고, 형제의 배고픔이나 가난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위해 모인 사랑의 공동체라면 마땅히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함께 나누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몸에 십자가를 긋는 것은 그분처럼 고난 받고 죽기 위해서이며, 집에 십자가를 모시는 것은 그분처럼 나도 십자가의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십자가를 하나의 부적처럼 몸에 달고 사는 것은 아닌가.
4. 교회의 성찰 (이기적인 집단을 넘어)
교회가 성전에서 거행하는 전례는 세상의 삶과 무관한 것일 수 없다. 교회는 신도들이 자기만의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을 넘어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 제물로 내놓은 그리스도처럼, 그리고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까지를 희생 제물로 내놓은 하느님처럼 자기를 또한 희생 제물로 바치게 해달라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집이다. 교회는 자기 구성원의 세속적 욕구(부자 되게 해 달라,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 달라.)를 충족시키는 기구가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 제물로 내놓은 그리스도의 성사이며, 구원의 도구이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실”(1 코린 11,27.29) 때 교회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
교회는 자기의 신자들에게 자주 미사에 참여하여 성체를 영하라고 강조할 것이 아니라 성체를 영한다는 것이 그야말로 시대적 사명임을 일깨워주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미사를 의무화한다면 자기희생을 의무화 하는 것이며 온 인류를 이 희생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활성화를 서로를 위해 얼마나 자기를 쪼개고 나누고 희생하는가보다 주일미사 참례자 수로 평가할 때가 많다. 그래서 주일 미사 참례자 수를 세어 상부에 보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동체의 일치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를 위하고 나누며 나아가 교회 밖의 사람들과도 나누는가에 달려 있다. 얼마나 이웃의 슬픔과 괴로움을 자신의 슬픔과 괴로움으로 삼는가 에 달려 있다. 모든 신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미사에 참례하여 영성체를 한다고 해도 저마다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공동체는 이기적인 집단일 뿐 세상의 평화를 위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근본 이유는 자기의 행복이 아니라 세상의 평화를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는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의무화하면서도 미사가 본래 지향하고 있는 세상의 평화를 위한 자신의 희생에 대해서는 덜 강조하고 있다. 이는 교회 자체가 세상의 평화를 위한 희생적 도구 역할을 다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교회는 자기가 신자들에게 강조하는 대로 스스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 스스로 이 일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와 기도는 이기적인 것이 되고 이런 기도를 중심으로 모인 교회는 위선적인 집단이 될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이를 보여주어야 한다. 자기가 왜 구원의 성사인지 깨닫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자기 존재로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자기가 무엇 때문에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지,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자기가 신도들과 세상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깨닫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자기의 신자들에게 미사를 거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스도의 삶과 이 삶을 사는 모습을 자기 존재로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성체성사 예식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전례와 세상 안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기의 존재로 보여 주어야 한다. “성체성사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적인 일치나 전례적인 형식뿐만이 아니다. 성체성사는 참여하는 공동체의 통교를 기념하고 전례 속에서 뿐만 아니라 삶 전체 속에서 그들의 생명을 나누는 것”(몰란드 106)이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만 공의회가 교회를 구원의 도구로 이해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신자들이 성체성사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의 현존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성체성사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성체성사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자기를 희생하며 만물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을 온 인류에게 체험하게 하는 하느님의 성사이며, 교회는 이 그리스도를 인류에게 체험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성사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사임을 깨닫는다면,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성사임을 깨닫는다면, 그분이 세운 성체성사가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기존의 예배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거행하신 성찬례는 겉으로는 구약의 종교 예식과 같아 보이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구약의 종교는 자기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존재를 잡아 희생 제물로 바쳤지만 예수님은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잡아 바치셨다. 구약의 희생제에서는 제물과 사제가 달랐지만 신약의 성찬례에서는 희생 제물이 사제요 제단이었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이 공동체는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남자도 여자도, 노예도 자유인도 없는 새로운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 소외되고 짓눌린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한 공동체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초대받고도 거부한 사람들 대신 이곳저곳에서 모아온 사람들로 가득 찬 결혼잔치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미사에 참여하는 이는 하느님이 사자를 보내어 이곳저곳에서 모아온 사람들이다. 우리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께 초대되었다.
교회가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곳이라면, 교회 자신이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가 성체성사를 올바르게 기념한다면 교회 자신만을 유지시키기 위한 모든 능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야 한다. 세상 식으로 말한다면, 교회 자신의 생존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고통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발을 씻어주고’ 그리스도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했던 것과 똑같은 과제를 선택해야 한다. 빵을 쪼개는 데에 참여하는 신자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닮은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기를 바라는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다. 기득권과 유지에 필요한 걱정, 그리스도에게는 가짜 안전이었던 것들로부터 그리스도처럼 발가벗기는 것을 의미한다.”(몰란드 120)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므로 희생의 제사는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인간 해방의 도구이자 상징이라 한다면,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육화의 연장이라 한다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자기포기를 기념하고, 그분의 희생을 자신 안에 현존시키는 것은 바로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이다. 이러한 진리의 의미는 미사 중에 세상을 위해서 하는 ‘신자들의 기도’라는 순전히 신심적인 차원만으로 표현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성체성사 안에 기억되고 있는 것이 세상 속엣 그것을 기념하고 있는 공동체에 의하여 실현되어야 한다.”(몰란드 122)
성체성사는 교회가 세상 안에서 인류의 아픔과 고통, 슬픔과 괴로움을 듣고 있다는 것을, 또 들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가 성체성사를 세상에서 가난하고 억압 받는 이들을 위하여 그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거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체성사는 세상과 격리된 곳에서 거행되는 전례용이 아니다. 오히려 전례가 세상 한복판에서 거행되어야 함을 그리스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체성사는 정치적인 면도 지닌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그들을 위한 신자들의 기도만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교회가 참회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개인적인 참회를 넘어 얼마만큼 남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는가, 혹시나 자기만의 행복을 위하여 살면서 이웃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반성을 요구한다. 교회도 참회를 해야 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위기를 자초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물질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다하더라도 이기적으로 발전한다면 그보다 더한 위기가 있을까?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배반 불리면서 평화를 바라는 것이 위기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미사를 드리는 교회 또한 이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부와 명예를 위하여 기도하는 이들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 때 공동체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성체성사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1. 시국미사와 하느님의 자기희생
국정원의 대선 댓글 의혹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혼란한 시국상황에서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국정원의 개혁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선언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그 이전부터 이미 용산, 제주의 강정, 밀양 등에서 끊임없이 시국미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를 두고 교회가 왜 현실정치에 깊이 개입하는가, 사제들이 왜 길거리에까지 나와서 시위를 하는가 하며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마저 그러하여 시국미사는 종전처럼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장에 천막을 치고 그 자리를 지키며 미사를 봉헌하는 동료 사제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진다.
길거리에서 종교 의식인 미사를 드리는 것이 정당한가 묻기 전에 우리는 그곳에서 거행되는 미사가 무엇인지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미사의 의미를 안다면 미사를 드리는 곳이 성전이라는 건물에 제한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미사는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의식이다. 이 미사는 이미 그리스도 이전 하느님의 자기희생에 기인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당신의 생명을 세상에 전달해주셨다. 인간이 아무리 사악하게 굴어도 하느님은 그들 마음 안에 살아계신다. 사람들은 악한 인간을 보면서 하느님이 그들을 벌해주기를 바라지만 하느님은 그들 마음 안에 살아계신다. 하느님이 그들 마음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편에서 하느님의 이 사랑을 실천하셨다. 사제 가문이 아니었지만 이웃(온 인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 이 자기희생이 그분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받아먹어라.” “이는 내 피다. 너희를 위하여 흘릴 피다. 받아마셔라.” 그분은 스스로 제물이며 제단이며 사제였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이를 통해 하느님의 자기희생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처럼 또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희생시키며 이웃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자기희생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을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세상에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자기의 행복을 위하여 황소와 염소 등 다른 존재의 피를 제단에 뿌리며 하느님과 화해하고자 한 구약시대와는 달리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잡아 희생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과 함께 자기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내놓기 위해서이다. 미사를 드리는 이는 그들 자신이 제단이며 희생 제물이며 사제인 것을 안다.
미사는 자기만의 부를 추구하는 세상에서 자기희생과 나눔만이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인류를 자기희생으로의 초대하는 잔치다. 이 잔치에서 그리스도인이 쪼개진 성체를 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쪼개고 희생하며 나누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이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하며 나누어주는 성체를 받으면서 “아멘” 하고 응답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온전히 녹이며 우리 몸 안에 들어오셨듯이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성체처럼 녹이며 이웃 안으로 들어가 사라지겠다고, 성체로 세상을 살겠다고, 거기에 세상의 평화가 있다고 응답하는 것이다. 미사는 자기희생이 없이는 달리 이 세상에 평화를 강물처럼 흐르게 할 수 없다는 진리를 일깨워 준다.
자기희생 없이 이웃의 행복과 세상의 평화에 기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미사의 핵심이다. 우리의 행복과 세상의 평화를 원하시는 하느님은 가난하고 고통 받고 소외된 인간,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의 마음 안에, 그들의 살과 피 안에 현존하신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이들의 살과 피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분의 죽음을 기억하는 미사를 드리는 이유는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하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주신 그분처럼 우리도 이 말을 하며 가난한 이, 소외 받은 이들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 그 마음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 얻을 것을 생각하는데 익숙해 있는 현대인은 부와 명예를 자기의 존재 안에 쌓으려는 욕심으로 더 큰 창고를 짓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고는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9)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는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돈과 권력의 유혹이 커서 자기희생과 나눔을 강조하는 것이 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인간은 남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행복을 희생할 줄 아는 존재이다. 부와 권력과 명예, 이런 것들이 행복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족하다 하더라도 인간은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재물과 권력을 자기를 향하여 쌓을 때는 불행의 늪에 빠져들기 일쑤이지만 남을 향하여 자기의 존재까지를 나눌 때 인생이 풍족해진다는 것 또한 안다.
나눔의 삶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본래 인간은 자기의 살과 피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시며 우리를 격려하신다. 혈연과 지연 학연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라. 실제로 우리는 자기희생과 나눔의 삶을 살고 있다. 부모의 자식 사랑, 자식의 부모 사랑, 부부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은 자기희생의 토양에서 나온 행위이다. 어찌 이 위대한 사랑을 가족 안에만 머물게 하겠는가. 이를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묶어두려고 할 때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으로 변질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만나는 세상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로 대하시는가 하면 모든 이를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자매로 대하셨다.(마르 3,31-35)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나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로 만날 때 우리는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가족 사랑의 심장에는 –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 인류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인류애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사랑은 순수하지 못하다.
천주교 신자들은 성체를 영하기 전에 사제가 “이 성찬에 초대를 받은 자는 행복하다.”는 말을 듣는다. 자기를 희생하며 나누는 자만이 인생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자기희생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은 행복을 원하는 자는 당연히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처럼 자신의 몸을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내놓기 위해서 미사를 드린다.
2. 미사의 장소
이 희생제사는 성전 안에만 제한되어 봉헌될 수 없다.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크리스마스(= 그리스도의 미사)의 현장은 마구간이었고, 그분이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당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며 미사를 봉헌한 곳은 성문 밖 십자가였다. 그분께서 많은 구경꾼들이 조롱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당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하늘에 바칠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복음사가는 전한다. 희생 제사의 절정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온 우주가 마음을 찢으며 그분의 희생 제물을 받아들인 것이다. 성전의 휘장을 찢는 그분의 희생제사에서 인류는 사랑을 느꼈고 평화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을 보았다. 미사는 가난하든 부자든, 힘이 있든 없든 모든 인간을, 종족과 언어와 혈통을 넘어 온 인류를 자기희생으로 초대하는 전례이다.
그분의 자기희생을 기억하는 미사는 성전의 휘장을 찢으며 온 인류의 마음 안으로 거행되는 희생 제사이다. 온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게 하는 미사는 그 성격상 성속을 가리지 않고 세상 어디서나 봉헌되어야 한다. 일정한 시간에 성당이라는 일정한 장소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은 세상 어디서든 미사를 드리기 위한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시국미사(시국미사라는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용어이다. 그만큼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교회의 모습을, 성체의 삶을 보여주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를 드리는 것은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지 못하고 자기만의 안일과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시국을 향하여 자신을 희생시킨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 보이며 세상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초대하기 위함이며, 세상 모든 이를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사제적 존재로 초대하기 위함이다.
미사는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 없이 자기의 안위와 행복을 위하여 남을 희생시키려는 마음으로는 드릴 수 없다. 사제들이 현장에서 시국미사를 드리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돈과 권력에 사로잡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소외시키고, 약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거민, 쌍용차 사건, 밀양 송전탑 사태 등은 자기를 희생시키지 못하는 마음, 남을 희생시켜 자기의 배를 불리려는 구조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자기희생의 소리가 터져 나와야 한다.
미사는, 즉 자기희생은 예식으로만 끝이 날 수 없는 삶 자체이다. 성전에서 시국을 위한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같은 이유로 이 소리는 성전 밖에서도 울려 퍼져야 한다.
미사를 성전 안에서만 드려야 한다는 주장은 미사의 핵심을 모르는 데서 나온 소리다. 우리는 자기희생을 성전 안에만 가두어 놓을 수 없다. 현장에서 드리는 미사에서 우리는 온 인류가 자기희생에 초대 받았음을, 시대가 자기희생을 목말라하고 있음을 읽어야 한다. 시국미사를 일종의 정치적 시위로 간주하려는 것은 미사의 이런 희생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제는 성당 안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도 온 우주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온 우주와 함께 미사를 드린다. 미사는 온 우주가 자기희생의 바탕에 근거하고 있음을 선언하며 온 우주를 희생으로 초대하는 제사이다. 그러기에 자기를 희생 제물로 내놓지 못한 미사는 미사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
세상의 평화는 자기희생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미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세상의 평화를 추구하는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에서 말한다.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왜냐하면 사도직 활동의 목적이 신앙과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가 한데 모여 교회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희생 제사에 참여하고 주님의 만찬을 먹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전례헌장 10항)
여기서 전례행위는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행위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하신 것은 일주일에 한번 성당에 모여 당신의 몸을 나누면서 당신을 기억하라는 명령 이상이다. 이 말씀은 미사 중에만 사제의 입을 통해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예식에 참례하는 모든 이가 – 아니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라도 - 일상에서 마음에 새겨야 하는 삶의 방향을 담고 있다. 아무리 주일을 거르지 않고 열심히 미사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밤샘을 하면서 성체 조배를 한다 하더라도 일상에서 자기의 살과 피를 이웃과 나누지 못하는 인색한 삶을 산다면 주일을 지키고 성체를 영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체를 영하는 신자는 자기의 몸을 성체로 주신 그리스도처럼 또 다른 성체로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자기의 살과 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이웃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쪼개고 희생하면서 이웃의 몸 안으로 녹아들어가는 행위가 어찌 전례를 행하는 중에만 일어날 수 있겠는가. 미사는 그 성격상 교회의 전례 안에 갇혀있을 수 없다. 자기희생, 신자들의 사제직분은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방향이다.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평화를 원한다면 자기희생을 근본으로 삼고 미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야 한다. 자기희생이 사라진 사회는 자비로울 수 없고 그렇기에 평화로울 수 없다. 미사는 자기의 행복을 빌기 위해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자기의 행복을 포기한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는 희생제사이다.
그리스도인이 대사제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영하는 이유는 자기만의 구원 자기만의 행복을 넘어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처럼 대사제로 세상을 살기 위해서이다. 이를 전례헌장은 이렇게 말한다. “전례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전례 안에서 인간의 성화가 감각적인 표징들을 통하여 드러나고 각기 그 고유한 방법으로 실현되며, 그리스도의 신비체, 곧 머리와 그 지체들이 완전한 공적 예배를 드린다.”(전례헌장 7항)
미사는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전례를 넘어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쪼개며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이며(ecce!) 세상이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시위이다. 그리스도는 성전 안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들판에서 만민이 보는 앞에서 돌아가셨다. 미사는 만민을 이 현장으로 초대하는 초대장이다.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을 때 평화의 빛이 세상을 향하여 발할 것이다. 미사 때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이 성찬에 초대받는 이는 복되도다.”하고 외치는 사제의 소리는 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모인 자들을 향한 소리가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다.
세상의 정의와 평화는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희생으로 내놓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찌 이 미사가 성전 안에서만 행해지는 전례이겠는가. 미사는 세상을 향한 소리이면서 미사를 드리는 사제 자신을 향한 소리이기도 하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모두가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평화와 정의를 외치는 소리는 자기를 희생 시키는 일이 없이는 공허할 뿐이다. 세상을 위하여 초대하는 자기희생에 응하는 자가 드디어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행복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전례헌장을 통하여 “사람들이 전례에 나아갈 수 있게 되기 전에 먼저 신앙과 회개로 부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9항)며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는 것도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한 삶, 일상에서 성체의 삶을 살지 못한 삶에서 신자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선포하여, 한 분이신 참 하느님과 그분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자신의 길에서 회개하고 참회를 하게 한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신앙과 참회를 권고하여야 하고, 더 나아가서 성사들을 받도록 준비시켜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고, 애덕과 신심과 사도직의 모든 활동으로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그러한 활동으로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 세상에 매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상의 빛이 되고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야 한다.”(전례헌장 9항)
3. 그릇된 성체 신심
성체신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이에게 위안과 행복을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마음을 발하게 한다.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분처럼 살겠다는 마음을 발하게 한다.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받아먹어라.”는 말은 사제만이 그것도 교회의 전례 안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을 전례용으로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구실로 더 이상 자기는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해석하며 편하게 사는 방식을 찾으려 하는 것은 성체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성체를 영하면서도 자기를 쪼개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안고서도 십자가를 지지 않고 안락하게 사는 꿈을 꾸는 것은 파렴치한 짓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묵상하면서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봉헌하겠다는 마음이 발발하지 않는다면 이는 잘못된 신심이다. 아무리 밤샘을 하면서 성체 앞에 꿇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하더라도 이 마음이 이웃 사랑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성체 앞에 앉아 있는 동안만 유효하다면 그 밤샘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체신심은 예수님의 관심을 나의 관심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웃에 대한 관심이다.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으로 내놓으신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으면서 자신의 안위와 행복과 구원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이들은 바오로가 당시 코린토 공동체 신자들을 질책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1코린 11,20) 그들은 주님의 고난은 기억하지 않고 자기 배 불릴 생각만 하며 성찬례에 참석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몸을 먹으면서도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11,21)하였던 것이다.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온전하고도 완전한 자기희생과 나눔과 사랑을 기억한다면 서로 많이 먹으려고 다투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몰염치한 짓인지 알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바오로는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하고 물으며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1,22) 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바오로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오로 자신이 그분의 자기희생을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 점을 다시 상기시킨다. “사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1,23-26) 어찌 그 몸을 자기만을 생각하며 먹을 수 있겠는가. 그런 마음으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1,27.29)
매일 영성체를 하여도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조금도 희생하지 못한다면, 희생 대신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만 바친다면 어찌 온 인류의 평화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주님의 몸을 합당하게 모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성체를 영하기 전에 서로 나누는 평화의 인사가 전례의 한 부분이기만 하다면 어찌 그 평화를 그리스도의 피로 주어진 평화라 할 수 있겠는가. 미사를 개인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여기는 풍토는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미사를 잔치로 이해하는데 이의가 없다. 미사가 잔치라면 미사를 통해 우리는 나눔을 접하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을 꾸짖었다면 그런 나눔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눔이 없는데 어찌 그 모임을 사랑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자기 먹기에만 바빴고, 자기 구원에만 관심이 있었고, 형제의 배고픔이나 가난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위해 모인 사랑의 공동체라면 마땅히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함께 나누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몸에 십자가를 긋는 것은 그분처럼 고난 받고 죽기 위해서이며, 집에 십자가를 모시는 것은 그분처럼 나도 십자가의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십자가를 하나의 부적처럼 몸에 달고 사는 것은 아닌가.
4. 교회의 성찰 (이기적인 집단을 넘어)
교회가 성전에서 거행하는 전례는 세상의 삶과 무관한 것일 수 없다. 교회는 신도들이 자기만의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을 넘어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 제물로 내놓은 그리스도처럼, 그리고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까지를 희생 제물로 내놓은 하느님처럼 자기를 또한 희생 제물로 바치게 해달라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집이다. 교회는 자기 구성원의 세속적 욕구(부자 되게 해 달라,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 달라.)를 충족시키는 기구가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 제물로 내놓은 그리스도의 성사이며, 구원의 도구이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실”(1 코린 11,27.29) 때 교회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
교회는 자기의 신자들에게 자주 미사에 참여하여 성체를 영하라고 강조할 것이 아니라 성체를 영한다는 것이 그야말로 시대적 사명임을 일깨워주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미사를 의무화한다면 자기희생을 의무화 하는 것이며 온 인류를 이 희생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활성화를 서로를 위해 얼마나 자기를 쪼개고 나누고 희생하는가보다 주일미사 참례자 수로 평가할 때가 많다. 그래서 주일 미사 참례자 수를 세어 상부에 보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동체의 일치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를 위하고 나누며 나아가 교회 밖의 사람들과도 나누는가에 달려 있다. 얼마나 이웃의 슬픔과 괴로움을 자신의 슬픔과 괴로움으로 삼는가 에 달려 있다. 모든 신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미사에 참례하여 영성체를 한다고 해도 저마다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공동체는 이기적인 집단일 뿐 세상의 평화를 위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근본 이유는 자기의 행복이 아니라 세상의 평화를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는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의무화하면서도 미사가 본래 지향하고 있는 세상의 평화를 위한 자신의 희생에 대해서는 덜 강조하고 있다. 이는 교회 자체가 세상의 평화를 위한 희생적 도구 역할을 다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교회는 자기가 신자들에게 강조하는 대로 스스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 스스로 이 일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와 기도는 이기적인 것이 되고 이런 기도를 중심으로 모인 교회는 위선적인 집단이 될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이를 보여주어야 한다. 자기가 왜 구원의 성사인지 깨닫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자기 존재로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자기가 무엇 때문에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지,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자기가 신도들과 세상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깨닫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자기의 신자들에게 미사를 거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스도의 삶과 이 삶을 사는 모습을 자기 존재로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성체성사 예식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전례와 세상 안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기의 존재로 보여 주어야 한다. “성체성사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적인 일치나 전례적인 형식뿐만이 아니다. 성체성사는 참여하는 공동체의 통교를 기념하고 전례 속에서 뿐만 아니라 삶 전체 속에서 그들의 생명을 나누는 것”(몰란드 106)이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만 공의회가 교회를 구원의 도구로 이해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신자들이 성체성사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의 현존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성체성사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성체성사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자기를 희생하며 만물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을 온 인류에게 체험하게 하는 하느님의 성사이며, 교회는 이 그리스도를 인류에게 체험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성사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사임을 깨닫는다면,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성사임을 깨닫는다면, 그분이 세운 성체성사가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기존의 예배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거행하신 성찬례는 겉으로는 구약의 종교 예식과 같아 보이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구약의 종교는 자기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존재를 잡아 희생 제물로 바쳤지만 예수님은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잡아 바치셨다. 구약의 희생제에서는 제물과 사제가 달랐지만 신약의 성찬례에서는 희생 제물이 사제요 제단이었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이 공동체는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남자도 여자도, 노예도 자유인도 없는 새로운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 소외되고 짓눌린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한 공동체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초대받고도 거부한 사람들 대신 이곳저곳에서 모아온 사람들로 가득 찬 결혼잔치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미사에 참여하는 이는 하느님이 사자를 보내어 이곳저곳에서 모아온 사람들이다. 우리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께 초대되었다.
교회가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곳이라면, 교회 자신이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가 성체성사를 올바르게 기념한다면 교회 자신만을 유지시키기 위한 모든 능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야 한다. 세상 식으로 말한다면, 교회 자신의 생존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고통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발을 씻어주고’ 그리스도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했던 것과 똑같은 과제를 선택해야 한다. 빵을 쪼개는 데에 참여하는 신자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닮은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기를 바라는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다. 기득권과 유지에 필요한 걱정, 그리스도에게는 가짜 안전이었던 것들로부터 그리스도처럼 발가벗기는 것을 의미한다.”(몰란드 120)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므로 희생의 제사는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인간 해방의 도구이자 상징이라 한다면,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육화의 연장이라 한다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자기포기를 기념하고, 그분의 희생을 자신 안에 현존시키는 것은 바로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이다. 이러한 진리의 의미는 미사 중에 세상을 위해서 하는 ‘신자들의 기도’라는 순전히 신심적인 차원만으로 표현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성체성사 안에 기억되고 있는 것이 세상 속엣 그것을 기념하고 있는 공동체에 의하여 실현되어야 한다.”(몰란드 122)
성체성사는 교회가 세상 안에서 인류의 아픔과 고통, 슬픔과 괴로움을 듣고 있다는 것을, 또 들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가 성체성사를 세상에서 가난하고 억압 받는 이들을 위하여 그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거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체성사는 세상과 격리된 곳에서 거행되는 전례용이 아니다. 오히려 전례가 세상 한복판에서 거행되어야 함을 그리스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체성사는 정치적인 면도 지닌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그들을 위한 신자들의 기도만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교회가 참회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개인적인 참회를 넘어 얼마만큼 남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는가, 혹시나 자기만의 행복을 위하여 살면서 이웃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반성을 요구한다. 교회도 참회를 해야 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위기를 자초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물질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다하더라도 이기적으로 발전한다면 그보다 더한 위기가 있을까?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배반 불리면서 평화를 바라는 것이 위기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미사를 드리는 교회 또한 이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부와 명예를 위하여 기도하는 이들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 때 공동체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성체성사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