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보다 신비 체험 통한 삶이 중요
예수 부활 사건이 일어난지 약 350여 년 후.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성인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고민하며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을 때였다. 한 어린아이가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성인이 다가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아이는 “바닷물을 모두 퍼서 이 모래 구멍에 담으려 한다”고 대답했다. 성인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게 가능하냐”고 말하자 아이는“당신의 그 작은 머리로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라고 대꾸했다. 성인이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자신의 문장(紋章)에 이 전설에 나오는 작은 조개 한 개를 그려 넣어, 이성의 한계와 계시에 대한 겸허한 마음을 드러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처럼 이해하기가 어렵다. 초중고등부 교리교사들은 “교리 시간에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교리 중 하나가 바로 삼위일체 교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다. 삼위일체 신비의 경이로움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할 순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세 위격은 분리되지 않으며 전적으로 동일하고 영원하며 전능하신 한 하느님이시다”로 요약된다.
이에 대한 가장 고전적 해석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관계론적 설명이다. 한 분 하느님 안에는 세 가지 존재 양식이 있으며, 그 중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의 속성을 기억, 인식, 사랑으로 정의하고, “기억, 인식, 사랑이 성부, 성자, 성령에게 해당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 초기 교회에선 촛불이 불꽃과 심지, 밀랍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 것을 삼위일체에 비교하기도 했다. 밀랍을 그리스도 육신에, 심지는 그리스도의 영혼에, 불꽃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연결시킨 것이다.
최근 많은 현대 신학자들, 특히 칼 라너는 이 신비를 구세사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에 따르면, 사랑이신 하느님은 사랑 안에 폐쇄된 채 머무르지 않고 당신 자신을 자유로이 외부로 건네주고자 하신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내어주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아들인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파견했고,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느님을 올바르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 주셨다.
따라서 한 분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가운데 여전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 머무르는 한, 그분을 ‘성부\’라고 부를 수 있다. 또 하느님의 이 자기 전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 데 우리는 이분을 ‘성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자기 전달을 주도하는 사랑의 원리를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이와 같이 구세사적 관점에서 이해할 때, 우리는 삼위일체 신비가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관통함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며 완성에로 이끄는 사랑의 하느님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체험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신학자들은 하느님 체험에 초점을 맞춘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아버지이신 성부 하느님은 우리 앞에 계시며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이시다. 아들이신 성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동반자요 벗이 되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신 성령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며 내부로부터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는 분이시다’는 설명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들이 모두 완벽한 것은 아니다. 다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좀 더 알기 쉽게 풀이하려는 방편들에 불과하다. 삼위일체 신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신비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체험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또한 그만큼 그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요한 복음 사가는 성령에 의해 우리가 신비에 동참할 수 있음을 밝힌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 12~13)
우광호 기자 woo@catholictim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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