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마태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외로움을 느끼며 사는 것이 인간이고 그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입니다. 가장 외롭다는 것은 가장 외롭지 않다는 역설적인 표현일런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외로움인가를 생각해보면 꼭 누군가  함께 있어야 외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정말 어려서부터 많은 외로움을 타고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상의할 사람이 아무도 없고 어려서 모든 식구들의 부양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언제나 외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나를 이해하고 끌어안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으로 나 스스로를 외톨이로 만들기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장에서도 유난히 외로움을 많이 나서 사람들과 잘 어울릴 줄을 몰랐습니다. 술도 먹지 못하고, 화투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춤도 못 추어서 나는 언제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유능하고  똑똑하다고 제쳐 놓고,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취급해서 나를 끼워주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고 잘 어울리지 않아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외톨이가 되었다고 생각하였고 대부분 독학을 하였는데 한문 공부, 외국어 등을 외롭게 공부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성당에서 혼자 성체조배를 하고 있었는데 그날도 외로움에 못 이겨 주님께 푸념을 하기로 작정하고 성당을 찾았고 멍청하게 감실을 바라보고, 고상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주님의 외로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으실 때 주님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생각해 보았고 자신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돌변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악을 쓰는 사람들을 보시며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 기둥나무에 묶여 혼자서 매를 맞으실 때, 가시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시면서 조롱을 받고, 가래침을 얼굴에 받으시며, 포승줄로 묶여 꼼짝달싹도 못하실 때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웃음거리가 되면서 십자가를 지고 해골산까지 걸어가실 때 주님의 외로움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또한 십자가에 달리시고, 하느님 아버지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하고 소리치실 때, 천지간에 아무도 당신께 관심을 갖지 않으실 때 주님은 정말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 58)고 말씀하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숨을 거두신 순간 가장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체 앞에 앉아 있으면 십자가에 덩그렇게 달려계신 주님을 보고 있노라니 나의 외로움은 외로움이 아니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보잘것없는 것이고, 주님의 외로움과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들고 불평불만이었던 내 삶이 부끄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 외로우신 순간,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셨고, 세상 사람들을 모두 당신의 품에 품어 안으심으로써 모든 외로움을 없애신 것입니다. 가장 외로운 분을 가장 외롭지 않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은 주님처럼 가장 외로울 때 외롭지 않게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되새기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장 외로울 때 주님은 내게 오시며,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주시며, 나를 가장 외롭지 않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외로움은 인생에 걸쳐 언제나 붙어 다니면서도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가장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조금도 외로워하지 말라고 위안을 주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은 우리의 가장 작은 가정 공동체부터 구역 반 공동체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외로움을 타는 것은 가정과 소공동체에서 외톨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조금도 외롭지 않을 조건을 나는 스스로 만들면서 외롭다고 푸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공동체를 이루는 요건으로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내게 잘못한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용서함으로써 한 형제 되면 조금도 외롭지 않을 것이며, 그 사람들과 같이 계신 주님을 영접하여 같이 살아 계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내가 외로운 것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묵상하면서 나는 갑자기 행복해졌습니다. 정말 인간의 마음은 변덕이 죽 끓듯 하나봅니다. 외롭다고 느낄 때, 내가 혼자라고 느낄 때, 정호승님의 ‘수선화에게\’라는 시를 명상하듯 읽으며 위안을 받습니다. 내가 자기사랑에 빠져 있는 수선화와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2007-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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