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7일 부활 성야

by 정태영 posted Feb 0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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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7일  부활 성야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루카24,1-12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그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아마포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


  오늘은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서 기도하고 왔습니다. 벌써 돌아가신지 35년이 되는데 산소에 엎드려 가슴에서 솟구치는 많은 감정들을 어쩌지 못하고 이끼가 많이 낀 산소를 깨끗하게 떼를 입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사초를 부탁하고 아버지께 용서를 청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0년 만에 공동묘지에서 교회 공원묘지로 이장을 하였고 혼자서 지성을 다해서 산소를 돌보고 살았다고 하지만 정말 성의 없이 대충대충 산소에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잔디가 잘 살지 않는 곳이라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내 무덤은 어떤 모습일지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죽을 준비를 잘하고 죽었다고 한다면 자식들이 애통해 하면서 수시를 거둬주고 나를 삼베로 싸서 손에 묵주를 쥐어주고, 썩어서 흩어지지 않게 꼭꼭 묶어서 관 속에 넣고 흔들리지 않도록 솜을 구석구석 넣어서 염습 입관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였던 사람들이 연도를 바쳐주고 장례미사도 봉헌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무덤을 만들고 우리집안의 전통대로 탈관해서 땅속 깊이 묻고 흙을 덮어서 대략 1m 50cm이상 흙을 쌓아둘 것입니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무덤을 파헤치기 전에는 만날 수도 없고, 무덤을 파헤친다고 하여도 이미 탈수가 되어서 썩어버린 내 몸뚱이는 착 꺼져있어 내 모습이 아니라 추악한 냄새나는 상대하기 어려운 모습일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존경과 사랑이 없어진 해골의 몰골로 파헤치기 싫은 것이 혐오의 무덤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사랑하던 여인들이 찾아갑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큰 돌로 입구를 막아놓아서 그 돌을 치우기 전에는 아무도 무덤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흙으로 꼭꼭 다져서 시신을 만날 수 없지만 부활을 믿는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신을 자주 만나기 위해서 썩지 않게 처리도 하고, 돌만 치우면 만날 수 있게 만들어 놓습니다.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은 주님을 만나려고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와 막달레나, 요안나 마리아에게는 큰 걱정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고, 대사제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두 살아날 예수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살아나더라도 큰 돌을 치우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큰 돌로 막아 놓았을 것이고, 당시의 풍습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였다고 속이기 위해서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갈지도 모른다는 여러 가지 속내가 있어 돌로 막아 놓았을 것입니다.
 

   그 돌을 치우는 일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돌을 사람들이 치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시며 치우고 살아서 나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고 하지만 만나지 못하도록 장애가 되는 것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 모든 장애들이 바로 무겁게 가로막고 있는 돌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부귀와 권세와 온갖 영예로운 것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주님을 만나지 못한답니다. 편견과 아집과 고집과 교만한 마음의 우월주의와, 자신의 지식과, 세상의 가치관 등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단단한 돌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사탄의 유혹과 그 유혹으로 생기는 쾌락과 기쁨과 즐거움으로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모든 것이 가로막고 있는 돌이기도 합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다른 의견,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거리감이 생긴 내 마음이 그런 큰 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돌을 치울 힘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이며 돌을 치우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모습입니다. 그래서 세 여인들은 돌을 어떻게 치울까 하고 고민 하였을 것인데 주님이 치워 주셨습니다. 이 것은 주님이 은총으로 이런 돌과 장애까지도 모두 치워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새삼 느끼고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은총으로 이런 모든 장애를 치우시는데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 장애물을 치워 주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장서서 돌을 치우는데 나도 같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을 갖기 시작한 때부터 나는 예수님의 부활성야 미사를 지내면서 느끼는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특히 부활초에서 불을 옮겨 밝힐 때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캄캄한 밤에 화로에서 불씨를 불어 불을 일으키고, 촛불에 불을 밝히고, ‘그리스도의 광명’을 노래할 때 그 빛의 커짐에 따라 가슴에 묻어둔 내 모든 것이 환해지며, 밝아짐을 느낄 때의 환의와 기쁨은 정말 나를 설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영광송을 바칠 때 성당의 종을 크게 울릴 때 나는 정말 까닭 없이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내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실감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둠과 우울함으로 답답한 마음으로 매일을 힘들게 살아온 내 삶에 희망과 여명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와락 뛰어나가 부활하신 주님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가만히 누르고 미사를 참례합니다.
 

   가슴에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은 내가 얼마나 사순절 준비를 잘 하였는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사순절뿐만 아니라 그 동안의 삶에서 철저하게 죽었다면 부활성야의 감동이 더욱 커집니다. 그 동안 나의 삶을 통해서 체득한 하나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으로 살았다면 그날의 감동은 전혀 내게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처절하게 내가 죽었어야 영광스럽게 부활한다는 사실이 나이를 먹으면서 새롭게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항상 기억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죽은 내 시신에서 예수님을 찾을 수 없고, 썩어가는 유골에서 예수님을 찾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이제 죽을 때가 가까워지니 쉽게 이해됩니다.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 그 크고 무거운 돌을 다 치우며 무덤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주님, 저희가 사순절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주님의 모습대로 처절하게 죽었다면 당신을 따라서 영광스럽게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저희의 삶을 쇄신하여 죽음과 부활로 당신께 다가가게 하시고, 저희의 안일과 부족한 신심을 두텁게 하시어 저희가 돈독한 신심으로 당신의 부활을 닮게 하소서. 지혜의 성령을 보내시어 저희가 당신의 부활을 살게 하소서. 부활하신 주님!! 



2007-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