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4일 야고보 아저씨의 샬롬묵상--성주간 수요일

by 정태영 posted Feb 0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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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4일  성주간 수요일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마태26,14-25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무척 속이 상할 때가 많습니다. 첫째는 성경에서 묘사하는 잘 못 사는 사람들이 꼭 나와 닮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그들의 처신이 나와 비슷하고 그들의 말이 나의 말과 같은지 생각할수록 속이 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스카리웃 사람 유다가 예수님을 넘길 준비를 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에 찾기가 아주 쉬웠고 잡는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군인들이나 누구든지 얼굴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왜 유다가 필요했을까요. 예수님을 잡으면 포상도 있었을 것이고, 일 계급 특진도 약속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막상 예수님의 그 많은 기적을 베푸신 분을 소문만 들어서도 알 수 있었기에 막상 예수님을 잡을 용기는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감싸고 있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남다른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명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로써 최측근의 배신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명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는데는 대낮보다는 캄캄한 밤이 되어야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예수님을 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유다도 한편으로는 바랐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도 됩니다. 절대자이신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로마 사람들을 모두 물리쳐 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와 수석사제들은 오래 전부터 모종의 협상을 했을 것입니다. 은전 서른 닢은 예수님을 가지고 흥정하는 데에 그렇게 많은 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형식적인 하나의 과정이고 약속의 신표였을 것입니다. 아니면 착수금 명목으로 우선 서른 닢을 주기로 하고 예수님을 처형한 후에 더 주기로 약속했는지는 유다와 돈을 준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기도 할 것입니다.
 

  절대로 배반하지 않겠다고 또 “나는 아니라.”고 잘라 말하면서 예수님의 눈치를 보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내가 바로 그런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내가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핑계를 대고 있으며, 어떻게 둘러대고 있는 것인지 속속들이 전부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부끄럽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나를 지칭하여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이라고 지적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때가 되었다." 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일을 마감할 준비를 하시는데 주님의 '때가 되었다'는 말씀이 유난히 내 가슴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내가 많이 아픈 후에는 정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매일 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내게 섭섭하게 대하는 사람들도 칼날을 곤두세우지 않고 있답니다. 화를 내고 소리 지르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매일 죽을 준비를 하고 살고 있다면 그런 모든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런지 생각되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때가 되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나의 때는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 자체가 큰 교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자들과 유다까지도 “저는 아니겠지요?” 라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것은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아니라고 주님께서 입증해 달라는 강요의 말입니다. 물론 나도 지금 그렇게 말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절대로 저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자만하며 살아왔고, 이런 교만과 우월감에 사로잡혀 평생을 살았고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교만한 내게 말씀하시죠. "네가 그렇게 말한다." 나만 그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뜻이나 기대는 생각 하지도 않고 나만 자만하고 삽니다.   예수님께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뻔했다.’는 말씀은 유다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다가 얼마나 괴로워할 것인지를 가슴에 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픈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 하고 싶은 말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아픈 처지를 생각하시고 가슴으로 우시며, 제자의 회개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비통한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유다는 그래서 죽음을 선택한지도 모릅니다. 아마 가장 용서받고 싶었고, 가장 예수님께 잘못했다고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며 통곡하고 싶은 유다를 보시며, 아주 냉정하게 ‘네 일을 하 거라.’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채근담 전집(菜根譚 前集)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반기자, 촉사개성약석. 우인자, 동념즉시과모. 일이벽중선지로, 일이준제악지원, 상거소양의.” (反己者, 觸事皆成藥石. 尤人者, 動念卽是戈矛. 一以闢衆善之路, 一以濬諸惡之源, 相去宵壤矣.) 이 말은 뜻은 <자기를 반성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다 약이 되거니와, 남을 탓하는 자는 생각하는 것마다 흉기 곧 창과 칼이라. 이로써 하나는 온갖 좋은 길을 열고, 하나는 온갖 악의 원천을 파나니 하늘과 땅의 차이니라.>  지은 죄를 뉘우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다와 반성하고 새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 베드로의 삶을 생각하면서 운니지차(雲泥之差)를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비우고 새롭게 태어나는 성주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배반한 제자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그 아픔을 헤아려 아파하시는 주님! 저희가 교만한 삶으로 당신을 매 번 배반하고 돌아서면 당신을 아프게 하였나이다. 이제 저희 안에 자리하고 있는 교만을 용서하시고, 저희로 하여금 매 순간을 겸손하고 정성스럽게 살아 자랑스러운 제자 될 수 있도록 더욱 힘쓰게 하소서. 저희가 삶을 반성하고 성경 안의 의인들을 본받아 삶이 풍요로운 은총으로 가득 차게 하소서. 은총의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