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사람들에게는 수준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생각하건데 사실 사람들에게 무슨 수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학교에서 시험을 보거나 리포트를 받아보면 알고 있는 것도 엄청난 수준차가 있습니다. 같은 시험문제를 가지고 각자가 논술하는 것을 보면 정말 많은 차이를 나기도 하는데 어떤 학생은 아주 정성을 들여서 답안을 작성하는가 하면 어떤 학생은 정말 성의 없이 답안을 작성하고,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외워서 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문제를 가지고 강의를 해도 어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면학풍토나 학습태도에서 월등한 차이를 보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환경과 여러 가지 여건에 따라서 처음에는 아주 미미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점점 그 격차가 커져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양극화 현상까지 몰고 오게 되어있습니다.
양극화란 서로 다른 집단이나 계층의 형편이 갈수록 벌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경제 양극화 현상은 구조조정의 진행과 개방의 확대가 진전되면서 경쟁력의 우열에 따라 기업간 및 산업간 경영성과의 격차가 벌어지고 소득의 불균형이 심화됨으로써 발생하고 시장경제와 자유무역(Free trade)에 의하여 더욱 간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개최되는 피정이나 각종 프로그램은 많이 받는 사람은 점점 유식해지고, 똑똑해져서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신자들과 양극화 현상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참으로 조심해야 할 표현이지만 이제 도시의 신자들과 농촌의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전혀 다른 이방인들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수준이 점점 크게 벌어지고 있고 인터넷이 발전하고 사람들이 정보화매체를 이용하는 수준에 따라서 이런 현상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성서연구모임을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합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농사일에 바쁘고 하루 종일 많은 일을 하고 저녁에 성서공부를 한다고 하여도 할 힘이 남아있지 않고, 또 공부하려고 해도 너무 모르는 것이 많다고 지레 겁을 먹기 때문에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후한서에 운니지차(雲泥之差)’란 말이 나옵니다. 이는 <구름과 진흙처럼 차이가 크다.>라는 말입니다. 신자들 스스로 구름과 진흙과 같은 차이가 있다고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점점 돈을 더 벌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학식과 교양의 수준도 매일 다르게 느껴집니다. FTA 협상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은 일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리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성서공부도 하지 않는다고 닦달을 해 봤자 결국은 아무 승산이 없이 울리는 괭가리와 같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지례 겁을 먹고 미리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적당히 포기하고 사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와 교회의 양극화는 단순한 과정의 양극화를 넘어 신앙의 신 빈곤층을 양산 하는 등 구조적으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소공동체 운동이 열화와 같이 확산되면서 또 다른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소공동체의 궁극적인 문제는 모든 신자들이 빠짐없이 하느님 품안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한 형제․자매로 살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시와 농촌의 교회와, 같은 본당 내에서도 구역 반에 따라 지식과 의식의 수준에서 다른 양극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양극화의 확산 속도도 우려할 수준이라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지식으로 착각하고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교회 위화감 조성이 양극화의 한 단면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 양극화를 계속 방치했다가는 교회 공동체와 사회갈등의 심화로 이어지면서 하느님 나라의 기반을 엉뚱한 곳에서 흔들어 댈 수 있다는 우려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은 지식이 있다는 사람들과 수준 높은 차원의 설전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무식한 사람들과 설전을 벌이신다는 것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참고 일일이 이해를 시키시려고 참으로 고생하십니다. 지식이 있다는 사람들은 완전히 막무가내의 치한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마귀 들린 사람이라고 몰아 부칩니다. 예수님과 완전히 수준차이입니다. 운니지차의 관계보다 더 극심한 차이가 있지만 주님은 붙잡혀 돌에 맞아 죽을 지경까지 인내하십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 차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아주 극미합니다. 그러나 그 수준차이가 아주 심각한 증세로 나타나는 것은 바리사이들과 같이 많이 안다는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신앙으로 덜 성숙한 사람들을 품어 안을 줄 모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양극화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교회 상식이나 전례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사람들이 지금은 더 겸손해지고, 더 열심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오늘 주님과 설전을 벌이고 있는 무식한(無識漢)들 속에서 핏대를 올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생각이 머물게 됩니다.
주님! 오늘은 거센 비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어둑한 날입니다. 하루 종일 우리의 삶도 화창한 햇살이 지속될 수 없는 나약한 저희들이기에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합니다. 형제 자매들의 사소한 말과 행동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수없이 쥐어다 내려놓는 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지키며 그 안에 살 수 있는 은총 주시고 머리나 지식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보다 가슴으로 받아들이어 날마다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날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선교사랑방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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