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낮은 목소리로]교황과 해방신학

by 정태영 posted Jan 3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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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학한 해는 1987년. 그해 봄에 <미션>이란 영화를 보고 몸을 떨었다. ‘가브리엘의 오보에’라는 연주곡으로 유명해진 영화, 과라니족 원주민을 위해 투신하고, 결국 순교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회 사제들을 보고 “바로 저거다!” 하는 감탄을 연발했다. 해방신학은 내게 그렇게 왔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해방신학에 영감을 주었던 이 사람의 긴 이름을 주문처럼 외고,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을 성경처럼 읽었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각주에 실린 마누엘 신부의 이야기였다.

빈민촌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헌신적으로 살던 마누엘 신부는 어느날 스스로 이렇게 묻는다. ‘내가 사제가 아니었어도 이처럼 살았을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어도 이렇게 살았을까? 만일 복음서에서 예수가 명령했기 때문에 내가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면 나의 투신과 신앙은 불순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침내 사제복을 벗고, 그리스도교 신앙마저 포기한 채 무신론자로서 남은 생애를 빈민촌에서 살았다. 그런 마누엘 신부가 죽기 전에 이런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주님, 제가 무신론자로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역설적 기도는 우리의 사랑이 ‘무엇 때문에’가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내 사랑이 차올라서’ 사랑할 때에야 순정한 사랑임을 전해준다. 그에게 이제 상대방이 무신론자거나 이교도거나 아무런 걸림이 없다. 오직 ‘사랑 있음’만이 유일한 잣대가 된다.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에서 치셤 신부만큼이나 헌신적으로 병자를 도왔던 의사는 무신론자였다. 민중을 위해 사심 없이 투신할 수 있었던 수많은 ‘붉은 영웅’들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갈망해야 하는 것은 교리와 종교에 대한 순종적 태도보다는 ‘내 사랑의 크기’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권위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겸손하게 살면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를 한사코 강조한 이유는 누가 뭐라 해도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티에레즈는 해방신학이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의 한가운데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한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거기에는 고난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이 있고, 따뜻한 형제애와 너그러움, 겸손과 상호 보살핌이 있다”고 말한다.

교황의 고향인 라틴아메리카의 교회는 오랫동안 고난과 희망의 땅이었다. 1968년 메델린 주교회의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천명하고 1979년 푸에블라 주교회의에서 민중교회와 해방신학을 발전시키며 ‘정의로운 신앙’을 부추겼다. 1980년 군사정부가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 살해당하기 전 로메로 대주교는 “만일 그들이 나를 죽이면, 나는 다시 엘살바도르 민중 속에서 솟아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로메로처럼 수많은 사제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예언은 거듭됐다. 이를 두고 구티에레즈는 “예전에 가톨릭교회는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이유로 죽어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로메로가 피살된 이유는 교회의 권리를 수호했기 때문이 아니라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지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많은 사제들이 제주 강정에서, 대한문 앞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며, 국정원의 불법적인 대선 개입에 항의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오든이란 시인은 “일생 동안 마치 쉬운 일처럼 어려운 일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운명처럼 가난한 노동자들을 선택하고, 고난 안에서 오히려 기쁨을 누리는 사제들이 있다면, 이들은 아마 교황의 친구가 되고, 예수와 더불어 기꺼이 빈민가를 산책할 것이다.(한상봉)


 2013-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