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 신자

by 이화영 posted Jan 3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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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쟁이 신자]

                                     왜관 봉헌회 6기 봉사자 이 영순 오스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낱말 중에 ‘멋과 매력(魅力)’에 대해서 흔히 혼용해서 사용할 때가 종종 있다. 어느 단체든지 특강 전에 이 두 단어의 차이점을 설명하라고 질문해 보면 대부분 애매한 답변을 하기 일 수다.

 국어사전을 보면, [매력(魅力)]은 남의 마음을 호리어 사로잡는 야릇한 힘, 혹은 순간적으로 호리어 끌리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멋]이란 ①[ 태도나 차림새 등에서 풍기는] 세련된 기품. ② 격(格)에 어울리게 운치 있는 맛. ③ 흥취를 자아내는 재미스런 맛. 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와 같이 [매력]은 비교적 찰라 적이고, 충동적이며 즉흥적인 성향으로서, 이지적 사고(理智的 思考) 보다는 감성적(感性的)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멋]이란, 세련된 기품, 격조 높고 운치의 맛 등으로, [매력]의 어원 보다는 품격의 차이가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참으로 [멋]의 깊이와 무게와 값어치의 잣대로 평가할 때에는 3가지 기본 조건아래 이루어진다.

 첫째, 정신력(精神力)혹은 마음씨- SPIRIT.

 둘째, 세련된 솜씨 혹은 기술- SKILL

 셋째, 재료(材料)의 질- STUFF

 이와 같이 [멋]의 조건은 일명<3씨 혹은 3S>의 기본요건이 갖추어 져야한다. 어찌 보면 ‘멋과 매력’은 유사한 용어인 듯 여겨지지만 현격한 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세의 우리들의 삶에서 이 두 단어를 비교 조명해 볼 때, 풍요로운 물질문명의 향상과 질주하는 과학문명의 가속도 소용돌이 속에서, [멋]보다는 [매력]에 취해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신앙생활 속에서 세풍의 분위기에 편승되어 예외일 수 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한 예로 한국사회에서 200주년 기념 행사이후 많은 신자수가 증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울러 쉬고 있는 신자가 우리주변에 양산되고 있음을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한[매력]에 이끌려 성당 문을 넘어 섰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하는 인내와 고통이 예상과 빗나갔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설득하려해도, 자기합리화와 아집을 부리며 쉽사리 회두가 되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신자무리 중에는 여전히 기적의 매력, 기복적 매력, 아니면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더라. 등, 성전 앞 십자가를 바라보기보다. 신자들의 무리를 살펴보면서 빚어지는 갈등에서 상처를 받고, 또 상대방에 상처를 주면서,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흥분하는 모습에 부딪치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는 타 종파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어간 신자들에게 “에이! 같은 하느님인데”하면서 자위를 하지만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멋]의 첫째조건인 정신력(Spirit)으로 신앙인에게는, 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믿음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목표를 설정하여 험준한 등반에 도전하는 산악인처럼, 인간이 극복해야할 한계점에서 매번 포기하고픈 유혹과 극도의 난관과 고통들을 참고 또 참으면서 구원의 목표를 산정으로 하여 등반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신앙인 마음 안에 그 정신력의 핵(核)은 바로 사랑이다. 핵의 융합이 일어나면서 엄청난 에너지가 폭발하듯이, 신앙인의 마음속엔 사랑의 핵이 융합할 그 때를 위하여, 그 목표를 향하여 인고를 기꺼이 이겨내야 할 불굴의 정신력이 관건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조건은 세련된 기술(Skill)로서, 그 빼어난 솜씨가 돋보일 때 [멋]의 조건에 부합되듯이, 신앙인의 기술이란 ‘기도와 실천’이 아닌가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세련된 기술과 뛰어난 솜씨는 가시적으로 한 작품으로 평가받게 되는 유형적인 것에 비해, 신앙인의 세련된 기술과 솜씨란 대부분 무형적인 신심활동의 영역이기 때문에 가시적으로 분별하거나 평가하기가 매우 어렵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오랜 신앙생활을 통하여 조금씩 보인다고하면 겸손에 금이 생길 것 같은 우려심도 있지만, 한 예로 자연의 흐름을 보면, 시궁창과 같은 탁하고 더러운 곳에서, 그리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미나리나 물푸레와 같은 식물들의 역할은 자신은 오염되지 않으면서 항상 맑은 물로 정화 시키듯이, 봉헌회원으로 7년차 밖에 지나지 않지만, 세계도처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도원과 수도자님들, 열심하고 진실한 일반신자들의 희생과 기도덕분에,  탁하고 오염된 가운데 창조주의 섭리를 역행하는 역겨운 혼탁한 이세상이지만, 물을 정화시키는 식물들처럼, 우리들도 그분들의 기도 덕분에 세상 삶을 유지하고 있지 않는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신앙인으로 화제작품으로는 {마더 데레사 원장 수녀님과 김수환 추기경님}의 신앙생활의 걸 작품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정화시키고, 어두움의 등불처럼 큰 희망의 빛을 발하지 않았는가?

 세 번째 멋의 조건은 재료(材料)의 질(質)(Stuff)이다. 일반적인 명품의 기본요건은 희귀한 재료 내지는 강도가 강한 것으로 어렵게 작품을 창작해 낼 때 비로소 작품의 값어치가 결정 되어 지듯이, 필자의 시어(詩語)에 ‘인간은 하느님의 걸 작품’으로 늘 강조하며 인간을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신비(神秘) 그 자체가 아닌가?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들의 등급을 따지자면 모두가 평등하거나 똑같지는 않는 듯하다. 그 소행이나 됨됨이가 천차만별함을 역설하고 싶다. 이 세상에서 악한 짓을 하는 자는 지옥의 악마보다 더 잔인하고, 반면 착 하디 착 한 사람을 보면, 천당의 천사들도 찬사를 보낼 것 같은, 양극선상에서 과연 나는 어느 깃 점에 설 수 있는가를 가끔 생각에 잠겨 보기도 한다.

 과연 신앙인으로 나의 인간성, 즉 사람 됨됨이가 어느 정도 어느 선상에 머물 수 있을까?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다. 불교와 비교해보면, 인간이 스스로 인고의 역경을 격고 이겨내면서 해탈해야만 부처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니, 그 길이 얼마나 고행길인지 헤아려보지만, 계시의 교리를 믿는 크리스천은 굳건한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쉬운 길인가?, 그리고 종교선택을 잘했다고 쾌재를 부르지만, 그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니, 가야할 길의 목표는 선명하지만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분명 하지만, 그 믿음 안에는 조건들이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랑의 실천이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였고, 씨앗을 심어야할 땅이 좋아야 한다. 신앙인의 인간성과 됨됨이가 바로 좋은 밭을 의미하지 않는가? 우리 신앙인의 모습을 보고  소리 없이 전교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충동적이고 감성적인 [매력적인 신앙]추구를 지양하고, [멋진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결코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들은 분명히 길을 알고 있기에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만약에 험난한 산정 길을 등정하면서 길도 모르고 산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럽고 불행한 인생길이 아니겠는가?

 

 봉헌회원님들  [멋진 신앙생활]을 합시다. - 찬미 예수님!!!



2012-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