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대교구에서는 성모당 봉헌 90주년을 맞아
그 기념행사 중의 하나로 10월 6일~10일까지
성모님에 대한 특강을 준비하였답니다.
대구대교구의 큰 자랑인 성모당은 우리 신자들이
성모님을 공경하면서 그 모범을 따라 살도록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님 동굴을 본 따 만든 순례성지입니다.
따라서 90주년을 맞아 성모님에 대해 특강을 하는 것은
신자들의 영적선익을 위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모든 인류의 자애로운 어머니이신
성모님에 대한 올바른 강의는 우리의 신앙과 신심을 북돋워
예수님께 인도하는 지름길 역할을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개된 특강의 제목을 보면
심히 우려가 되는 내용들입니다.
특히 대구교구 사무처장 하성호 신부님의
“성모님이 삼신 할매인가?”와 광주교구 장용주 신부님의
“성모님이 수다쟁이가 되셨는가?”는 성모님을
희화화하는 정도를 넘어 모독을 하는 강의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마리아의 구원방주 가족들인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알고 계시듯 장용주 신부님은 나주 성모님을
조사도 하지 않고 단죄한 조사위원회의 실질적 리더로 알려진 분입니다.
조사위원회는 율리아 자매님을 조사할 때 비아냥거리며
상식이하의 질문만 하다 끝냈습니다.
장용주 신부님은 해방신학을 전공하셨는데
해방신학은 가톨릭 신앙과는 정반대인 공산주의 이론을 담고 있어
교황청으로부터 배척받은 이론입니다.
성모님 사랑의 메시지 말씀과 성모님을 배척하는
개신교 목사님들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질문들을 묵상하시면서
장용주 신부님과 하성호 신부님, 그리고 그분들에게 동조하여
성모님을 욕보이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도록 이 글을 올립니다.
 
1996년 1월 26일 오후 2시 30분부터 6시경까지
광주대교구 나주 성모님 조사위원회에서 위원장 김재영 신부님과
그 외 7명의 신부님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사 받았던 내용들을
간추려 기억나는 대로 질문, 답변 형식으로 적어봅니다.
◦ 질문 : “곱비 신부가 쓴 ‘가장 사랑하는 사제들에게’ 란
책을 읽었습 니까?”
답변 : “읽지 않았습니다.”
◦ 질문 : “그러면 곱비 신부가 쓴 책을 성모님이 보고
읽어준 것이 아 닌가 요?”
(하면서 자기들끼리 웃으며 빈정댔다.)
◦ 질문 : “파신부가 미용실을 그만 두라고 하여 그만 두었나?”
답변 : “아닙니다. 미용실 그만둔후 아파트에 있을 때
파 신부님을 만 났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렸는데도 신부님들은 미용실을 그만 둔 것은
파신부의 언질이 있어서 그만두게 된 것이라고 우기셨다.)
◦ 질문 : “메시지라는 것은 결국 회개하라는 것인데
성모님이 수다장 이인가?
그렇게 메시지를 길게 주게, 어떻게 생각해요?”
답변 : “저는 주시는 데로 썼을 뿐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자녀들이 못 알아들으면 더 잘 알아듣도록 보충 설명을
해 주시듯이 성모님께서도 마 찬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 질문 : “성모님이 말씀하실 때 어려운 단어를 많이 썼는데
그 중에 “촉범”이란 말을 한문으로 주셨는가?”
답변 : “아닙니다.”
◦ 질문 : “촉범에 대하여 많은 설명이 나왔는데 그러면 그것도
틀릴 수가 있겠네?” (하면서 빈정대며 웃었다)
◦ 질문 : “지금 교회가 전통적으로 잘 되어가고 있는데, (1995년 2월 2
일 메시지에 관하여 교의를 운운하며) 그렇다면 성모님은
지금 우리 교회가 잘못되어 간다고 생각하신 데요?”
답변 : “저는 주시는 말씀을 적었을 뿐입니다. ”
◦ 장용주신부 : “오전에 파신부님 계실 때는 향기가 나지 않았는데
율리아 자매님이 오니까 이렇게 향기가 납니다.
전에도 율리아 자매님이 교구청에 다녀가면
향기가 나는데 왜 그렇죠? 창문을 몇 번씩이나
열어 봤는데 열면 더 많이 나고 있어요.
율리아 자매에게서 나는 것 아니에요?”
(장용주 신부님은 창문을 활짝 열면서 말씀 하셨다.)
답변 : “제게서 맡아보셔요”
(장용주 신부님은 책상 건너편에서 나를 향하여 얼굴을 내밀며
냄새 맡는 모습을 하더니 “나는구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안타까워 옆에 계신 신부님께 나의 몸을 내밀며
“신부님께서 한 번 맡아 보셔요” 하니까 신부님은 앞을 향하여
두 손을 뻗치시면서 “지금 많이 나고 있잖아요”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신부님들은 나의 몸에서는 직접 맡아보지 않았다.
온 사무실에 가득찬 향기가 나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아닌데도
율리아에게서 난다고 고집하니 너무 마음이 아파 신부님들에게
답변해 드렸다.)
답변: “장미향기는 하느님의 선물인데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
시는 사랑과 우정과 현존의 표시입니다.” (그랬더니 몇몇 신부님
들이 비웃었다.)
◦ 장용주 신부: “성모상을 교구청에 가져가도 되겠어요?”
답변: “순례자들이 순례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만 해주신다면 얼마든지요.
저는 숨어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성모님을 방치해둔다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 실은 이천수 (나자로) 신부님이 나주 본당 주임 신부님으로 계실 때
성모님상을 나주 본당에 모시기로 결정하고 주임신부님은 교구장
님을 찾아가 말씀드렸다.
그러나 교구장님의 반대로 본당에 성모님상을 모시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교구청에 성모상을 모셔간다면 순례의 성모님 상으로 모시지 않
을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재민 신부님께서 다른 질문을 하셨는데 대답 할 겨를도 없이
장용주 신부님이 얼굴 표정까지 변해가면서 정색을 하며 말씀하셨다.)
장용주 신부: “아니 율리아씨, 나는 율리아씨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말했는데 율리아씨가 ‘주교님께 성모상을 좀 모셔 가십시
오’ 하고 말을 못할 망정...” (하면서 두 손을 뻗쳐가면서
까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조사위원장: “조사도 할 수 있으니까 우리가 달라면 주어야지 뭐” (조
소하는 말투였다) “신학적으로 봐서 성부는 말씀하실 수
가 없어요. 그런데 1995년 6월16일에 말씀하셨다고 율리
아가 친필로 썼다. 그런데 예 수님과 성모님은 인성으로
나셨기에 말씀하실 수 있었지만 그분들도 2000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 이재민 신부: “성모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시려면 하늘에서 내려오셔
야 되는데 하늘은 추워서 어떻게 내려오느냐?”
(이 말을 들은 신부님들은 또다시 한바탕 웃었다
답변할 시간을 주지 않은 채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 질문: “성부께서 1995년 6월 16일 율리아에게 “지금 징벌을 내려도
되겠느냐?” 하셨다는데 율리아씨가 대답했더라면 세상에 벌을
내리셨겠네?”
(하며 입을 삐죽거리며 빈정댔다.)
◦ 이재민 신부: “내가 성모님의 메시지와 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
떻게 하겠어?”
답변: “그렇다하더라도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할수 없지요, 기도할
수 밖에요...”
(하고 대답하자 옆에 계시던 6명의 신부님들이 모두 큰소리로 웃었다.)
◦ 질 문: “파 신부도 신학적인 문제에 대하여 모르는 점이 있었어요.”
답 변: “예?” 하고 놀라서 내가 반문하자
장용주 신부: “파신부 자신이 몇 가지 몰랐던 것 직접 인정했어요.”
※ 조사가 끝나고 나서 파신부님께 말씀드렸더니 깜짝 놀라시며 “그
런 일은 전혀 없었다” 고 말씀 하셨다.
◦ 질문: “율리아 자매가 그렇게 많이 아팠다는데 율리오씨에게 물어 보
았을 때 율리오씨는 어디가 아픈지 모른다고 했어요.”
※ 교구청에 다녀온 후 율리오씨에게 물어보았더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 질문: “율리아씨 메시지가 일기와 조금씩 틀린 부분도 있고 삭제된
부분도 있으며 글씨도 틀린 부분이 있는데 왜 그렇지요?”
답변: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바쁜 일정 속에 일기 쓰듯이 급하게 썼기
때문에 문맥상 표현이 잘못되었을 때 정정한 부분은 있지만 틀
리게 고 친 적은 없으며 글씨가 틀린 것은 고통을 많이 받을 때
와 건강할 때 글씨가 틀려질 때도 있습니다.”
◦ 질문: “율리아 자매님이 낙태한 사실이 있다는데 사실입니까?”
답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몇 신부님들이 일기에 자필로 써 있
다고 우기셨다.)
질문: “딸 로사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간 적이 있습니까?”
답변: “예, 있습니다.”
질문: “박 안드레아와 함께 딸을 데리고 낙태시키려 갔습니까?”
답변: “아닙니다. 임신했는지 확인하러 갔습니다.
질문: “병원에 간 날은 언제고 혼배 성사 날짜는 언제죠?”
답변: “확실히 기억이 안 납니다.”
질문: “흥, 그 중요한 것을 몰라?, 웃기네, 참...”
무시하며 질시하는 말투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답변: “죄송합니다. 성모님 메시지 외에는 모르는 것이 많아요”
이밖에 딸 로사에 대하여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들을 계속했으며 대답
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 질문: “인천에 가서 떨어뜨린 장미향기 나는 천조각은 어떻게 된거죠?”
답변: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모님께서 향유 흘리실 때 발밑에 받쳐
두었던 조각인데 저를 도와주던 미카엘라 자매가 제가 가장 좋
아했던 성서귀절 마태오 복음 5,11- 12절에 넣어 둔 것입니다.
그런데 1994년 11월 24 일 밤 부천 원미동 성당에서 있었던 은
혜의 밤에 메시지 전달이 있었는데 그때 그 자매가 성서책을 가
져오면서 빠뜨린 것입니다.”
◦ 질문: “미리내 황데레사의 고통을 전수 받았다는데?...”
답변: “전수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안 그래도 황데레사씨가 나이가 들어서
고통 받기가 힘들어 율리아가 고통을 이어 받았다는 말을 전해듣고
제가 미리내로 전화해서 제가 어떻게 고통을 이어 받습니까?
저는 1982년 부활 때부터 고통을 청하여 받았기 때문에 고통을 이어
받은 것이 아니니 시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황데레사씨에게
전화했는데 “알았어, 미안해 우리 수녀들이 그랬나봐, 고치라고
그럴게” 한 적도 있습니다.”
질문을 통해서 진정 알아볼 일들이 많을 텐데 참으로 알아야될 일들은
묻지 않으시고 불필요한 일들을 계속 질문하다가 3시간 30분이 금방
지나가 끝날 시간이 되어버렸다.
주교님께서는 이 나자로 신부님께서 본당 신부님으로 계실 때 눈물과
피눈물 그리고 메시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목
격했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는다”라고 하셨고 또 사제회의 때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을 다른 신부님들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조사위원회 신부님들은 그 말을 은폐하기 위함인지
“주교님이 눈물과 피눈물과 메시지를 인정하신 일 없지요?”
라고 말하며 나의 대답은 듣지 않으신채 장용주 신부님은 “그런데 파신
부님이 그런 내용들을 외국에 보내어 일본이나 카나다에서 그런 이야
기들이 신문에 나오게 했다”라고 했다
내가 이야기할 틈도 답변할 겨를도 없이 다른 화제로 바뀌었기에 그 이
야기를 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갔다. 그 이야기만은 꼭하고 올려고
했는데 못내 아쉽다. 이제까지 성모님께서 주신 메시지나 징표에 대해
서 관심보다는 자녀(딸)의 사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많이 논의했던 점에
대하여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나는 조사를 끝내고 나오면서 신부님들께 “주님과 성모님 사랑 안에서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교구청을 나왔다.
1996년 1월 29일
나주 윤 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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